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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 5. 9.

    by. tispy

    목차

      한 증류소에서 세 가지 세계를 마시다

      위스키를 마신다는 건 곧, 한 지역의 기후와 토양, 전통과 실험 정신을 동시에 마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한 증류소에서 '가장 피트 없는 위스키'와 '세계에서 가장 피트가 강한 위스키'를 동시에 만들어낸다면 믿으시겠어요? 그것이 바로 **브룩라디(Bruichladdich)**입니다. 아일라 섬 서쪽의 작은 항구 마을에 자리한 이 증류소는 위스키의 고정관념을 뒤엎는 도전으로 세계 애호가들의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브룩라디 증류소가 어떻게 ‘순수함’과 ‘극단’을 넘나드는지, 그 역사와 철학, 그리고 대표 제품을 통해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1. 브룩라디의 철학 – 사람의 손이 닿는 모든 것을 믿는다

      브룩라디 증류소는 1881년,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초기에는 비교적 전통적인 몰트를 생산하던 곳이었지만, 1994년 폐쇄된 이후 거의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01년, 독립 병입자이자 위스키계의 반골 ‘짐 맥이원(Jim McEwan)’이 이 증류소를 인수하면서 역사가 뒤집히기 시작합니다.

      그의 신념은 단순했습니다. “위스키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브룩라디는 전통적인 증류 방식과 수작업 중심의 공정을 고집합니다. 냉각 여과(No chill filtration), 인공 색소 무첨가, 그리고 ‘Non Age Statement(숙성연도 미표기)’의 실험적 제품 출시 등, 이들은 위스키 시장에서 보기 드문 철학을 견지하며 ‘진정성’을 브랜드 정체성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브룩라디는 기계화보다 인간의 감각과 판단을 우선시합니다. 증류 과정에서 사용하는 전통적인 포트 스틸은 수십 년째 교체되지 않았고, 여전히 직접 불을 다루는 증류 담당자의 손길에 의존합니다. 이는 현대적 자동화 설비와는 정반대의 접근 방식이지만, 이곳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맛'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역성’입니다. 브룩라디는 아일라에서 수확한 보리만을 사용하는 제품 라인업(예: Islay Barley 시리즈)을 통해 위스키가 자라나는 ‘토양의 맛’을 직접적으로 전달하고자 합니다. 이들은 ‘토양이 곧 위스키의 언어’라고 말합니다. 즉, 한 병의 브룩라디에는 단순한 곡물 발효의 결과물이 아닌, 지역의 미네랄, 기후, 바람, 그리고 시간까지 녹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의 슬로건은 ‘Progressive Hebridean Distillers’ — 즉, 전통을 기반으로 한 급진적 실험주의자들입니다. 피트의 유무를 넘어서, 브룩라디는 ‘무엇이 위스키의 본질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증류소이며, 이 철학이 전 세계 애호가들과 공명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 브룩라디의 세 얼굴 – 클래식, 포트 샬롯, 옥토모어

      브룩라디의 제품군은 크게 세 가지 콘셉트로 나뉩니다. 하나의 증류소에서 이토록 상이한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곳은 브룩라디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Bruichladdich – 순수함의 정석

      • 피트: 전혀 없음 (0ppm)
      • 특징: 달콤한 꽃 향, 오크와 시트러스, 해안의 짠 내음
      • 대표 제품: The Classic Laddie (도수 50%)
      • 가격대: 약 90,000 ~ 120,000원
      • 페어링: 생굴, 바질페스토 파스타, 브리 치즈

      🔥 Port Charlotte – 정제된 스모크

      • 피트: 약 40ppm
      • 특징: 피트와 크림, 바닐라, 레몬필, 통후추
      • 대표 제품: Port Charlotte 10 Year Old (도수 50%)
      • 가격대: 약 110,000 ~ 140,000원
      • 페어링: 훈제 연어, 그릴드 소시지, 로즈마리 치킨

      💥 Octomore – 세계 최강 피트

      • 피트: 80~300+ ppm (배치마다 다름)
      • 특징: 무겁고 강렬한 스모크, 다크초콜릿, 타르, 젖은 돌
      • 대표 제품: Octomore 13.1, 13.2 등 (도수 59~63%)
      • 가격대: 약 200,000 ~ 350,000원
      • 페어링: 진한 육회, 트러플 치즈, 바비큐 폭립

      이 세 가지는 단지 스타일의 차이가 아니라, 위스키의 철학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실험이자 선언입니다. 같은 물, 같은 증류소, 다른 철학 — 그것이 브룩라디입니다.

       

      3. 맛의 지도 – 브룩라디가 그리는 풍미의 확장성

      브룩라디의 위스키를 한 잔씩 시음해보면, 각 제품의 입자감과 구조감이 확연히 다름을 느끼게 됩니다. 클래식 라디는 마치 봄날의 들판 같고, 포트 샬롯은 초가을 해안가의 불가에서, 옥토모어는 한겨울 밤의 장작불 같은 인상을 줍니다.

      브룩라디가 그려내는 풍미의 지도는 ‘강도’나 ‘연령’이라는 일차원적 기준이 아니라, ‘감각적 밀도’와 ‘개성의 방향’으로 구분됩니다. 예를 들어, 클래식 라디는 입 안에서 산뜻하게 퍼지며 라벤더와 꿀, 청사과 같은 향이 흐르고, 목 넘김이 매우 깔끔해 초보자에게도 부담이 없습니다. 반면, 포트 샬롯은 스모키하지만 그 속에 시트러스와 오크의 단단한 뼈대가 있어 중급자에게 적절한 도전이 됩니다. 옥타모어는 그야말로 위스키계의 롤러코스터로, 한 모금에 풍미의 기복과 여운이 극적으로 밀려옵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이 세 위스키가 ‘강함’으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영역에서 가장 섬세하게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옥타모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피트 수치를 자랑하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꿀과 크림의 부드러움은 마치 시적 장면처럼 펼쳐지죠. 이처럼 브룩라디는 ‘세게 만들기’보다 ‘깊게 만들기’에 더 집중합니다.

      또한 브룩라디는 빈티지, 캐스크(버번, 셰리, 프렌치 와인), 그리고 토양 정보까지 병에 표기하는 정직한 정보 제공으로 소비자의 신뢰를 얻고 있습니다. 병 라벨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단지 생산일과 도수가 아니라, 그 위스키가 살아온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죠. 이는 ‘위스키는 소비자가 함께 읽는 책’이라는 그들의 철학을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그 결과, 브룩라디는 위스키를 ‘마시는 것’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확장시킵니다. 바, 가정, 모임, 선물 — 어떤 상황에서도 다양한 감정선을 자극하는 이 브랜드는, 단 하나의 풍미가 아닌 하나의 ‘풍경’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4. 투어와 철학 – 증류소에서 배운다는 것

      브룩라디의 증류소 투어는 ‘공장 견학’이 아니라 ‘철학 수업’에 가깝습니다. 방문객은 직접 몰팅 과정, 캐스크 관리, 시음에 이르기까지 전 공정을 체험할 수 있으며, 짐 맥이원이 강조한 “위스키는 사람의 이야기다”라는 정신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 투어 구성: 시그니처 투어, 프라이빗 셀렉션, 피트 라인별 비교 테이스팅
      • 기념품: 투어 한정 위스키, 보리 샘플, 라디 블루 전용 글렌캐런 잔
      • 추천 시기: 여름보다는 가을~초겨울, 조용하고 깊은 분위기에서 진짜 향을 느낄 수 있음

      브룩라디는 그들의 실험을 소비자에게 숨기지 않습니다. 투명한 공개, 고집스러운 철학, 그리고 직원들의 자부심. 이 모든 것이 ‘브룩라디’라는 이름 하나에 담겨 있습니다.

       

      위스키의 폭을 넓히고 싶은 당신에게

      브룩라디는 단순히 ‘맛있는 위스키’를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그들은 위스키를 통해 “우리의 지역, 토양, 사람, 철학”을 전달하려 합니다. 그래서인지 브룩라디는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위스키를 왜 마시나요? 진짜 맛 때문인가요, 아니면 진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인가요?”

      당신이 지금 새로운 스타일을 탐험하고 있다면, 아니면 단 하나의 위스키 브랜드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싶다면, 브룩라디는 가장 이상적인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익스트림부터 순수까지, 단 하나의 증류소가 보여주는 위스키의 모든 가능성. 그것이 브룩라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