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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바람을 머금은 위스키, 조용한 반전을 선사하다
“아일라 섬 위스키라면 피트향이 지배적일 것이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대부분의 위스키 애호가도 그렇게 믿습니다. 강렬한 훈연향과 요오드, 해조류 같은 인상을 남기는 아일라 위스키. 하지만, 그 모든 전제를 부수는 증류소가 있습니다. 바로 부나하벤(Bunnahabhain).
피트의 섬에서 피트를 벗어난 이 조용한 반역자는, 독특한 방식으로 위스키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부나하벤 증류소의 역사부터 주요 제품, 시음 노트, 페어링 팁까지 아일라의 이단아가 왜 사랑받는지 낱낱이 파헤쳐봅니다.
1. 부나하벤 증류소의 역사 – 고립 속에서 빚어진 정직한 맛
1881년,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 북동쪽 해안가. 거친 파도와 회색 구름이 내려앉은 이 외진 땅에 ‘부나하벤(Bunnahabhain)’이라는 이름의 증류소가 탄생합니다.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강어귀”를 뜻하는 이름처럼, 바다와 맞닿은 지점에 위치한 이 증류소는 당초부터 외부와의 교류가 어려운 고립된 지형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피트를 사용한 전통 아일라 스타일 위스키를 생산했지만, 1960년대에 접어들며 전면적인 변화가 시작됩니다. 당시 세계 시장에서는 보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스타일의 싱글 몰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고, 부나하벤은 이에 발맞춰 ‘비피트(non-peated)’ 위스키 생산을 본격화했습니다. 이는 아일라 섬에서 파격적인 결정이었고, 한때 일부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비주류로 치부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부나하벤은 꿋꿋하게 고유한 철학을 지켜나갔고,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섬에서 태어난 부드러운 위스키’라는 아이덴티티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해양성 기후 속에서 셰리 캐스크를 활용한 숙성 방식은 독특한 감칠맛과 미네랄 노트를 만들어내며, 기존 스코틀랜드 본토의 셰리 위스키와도 차별화된 맛의 층위를 형성하게 되죠.
1993년에는 번아하벤 증류소가 일부 폐쇄되기도 했으나, 이후 재개장과 함께 생산 설비 현대화가 이루어졌고, 현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디스틸 그룹(Distell Group) 산하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또한 2021년부터는 자체적으로 고도화된 증류 시스템을 재정비하며 생산량과 품질 모두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부나하벤이 과거 증류소 직원들의 거주지였던 코티지를 여전히 보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당시 가족 단위로 항구에 의지해 자급자족하며 생활했고, 부나하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마을이자 공동체였습니다. 이러한 유산은 오늘날 브랜드 철학과 마케팅에도 강하게 반영되어, 위스키를 단지 상품이 아닌 ‘시간과 전통의 증명’으로 대하는 관점으로 이어집니다.
- 설립: 1881년
- 현재 소유주: 디스틸 그룹(Distell Group)
- 주요 특징: 비피트, 셰리 캐스크 숙성, 해양성 기후의 영향
2. 부나하벤 위스키의 특징 – ‘고요하지만 깊은 바다’ 같은 풍미
부나하벤 위스키는 첫 향부터 기존 아일라 위스키와는 전혀 다른 결을 보여줍니다. 요오드나 소독약 향 대신, 드라이한 셰리, 해조류, 살짝 젖은 나무, 따뜻한 바닐라, 그리고 미네랄 풍미가 코를 간질입니다.
한 모금 머금으면, 초콜릿과 말린 과일의 단맛, 스파이스, 바다소금의 짠맛이 층을 이루며 퍼지고, 피니시는 놀랍도록 길고 부드럽게 이어지죠. 흡사 스코틀랜드 해변에서 안개 속에 파묻힌 채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 향: 셰리 와인, 건자두, 미네랄, 오크, 소금기 있는 바람
- 맛: 말린 무화과, 헤이즐넛, 토피, 캐러멜, 약간의 후추
- 여운: 따뜻하면서도 드라이, 가벼운 해조류와 견과류의 여운이 지속됨
특히 부나하벤의 비피트 위스키는 입문자에게도 훌륭한 선택이며, 기존 아일라의 강렬함에 지친 애호가들에게는 새로운 휴식이 되어줍니다.
3. 인기 위스키 라인업 – 가격, 맛, 향, 페어링까지
🥃 Bunnahabhain 12 Years Old
- 도수: 46.3%
- 특징: 부나하벤을 대표하는 제품. 셰리 숙성과 해풍의 조화, 부드러운 구조감
- 가격: 약 90,000 ~ 110,000원
- 페어링: 다크초콜릿, 브리 치즈, 캐러멜 무스
🥃 Bunnahabhain 18 Years Old
- 도수: 46.3%
- 특징: 복합적인 풍미. 건포도, 가죽, 오래된 셰리통의 깊은 단맛과 짠맛의 조화
- 가격: 약 180,000 ~ 230,000원
- 페어링: 스테이크, 트러플 감자, 올드 체다치즈
🥃 Bunnahabhain Toiteach A Dhà
- 도수: 46.3%
- 특징: 부나하벤에서 보기 드문 피트 위스키. 섬세한 스모크와 오크, 견과류 풍미가 인상적
- 가격: 약 100,000 ~ 120,000원
- 페어링: 훈제 연어, 매콤한 바비큐, 허브 치킨
🥃 Bunnahabhain Stiùireadair
- 도수: 46.3%
- 특징: 셰리 캐스크 중심의 블렌딩으로 달콤하고 따뜻한 풍미. 젊지만 매력적
- 가격: 약 70,000 ~ 90,000원
- 페어링: 크림치즈 타르트, 허니넛 스콘, 흑설탕 쿠키
부나하벤은 전 세계 40개국 이상에 수출되며, 특히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셰리 위스키를 좋아하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숨겨진 보석’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죠.
4. 부나하벤 증류소 투어 – 안개 속에서 마시는 위스키 한 잔
부나하벤 증류소는 아일라섬 북쪽 끝, 해안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숨은 명소입니다. 도착하면, 안개 낀 바다와 붉은 지붕의 증류소가 만들어내는 영화 같은 풍경이 펼쳐집니다.
- 투어 프로그램: 클래식 투어, 시음 전용 투어, 숙성 창고 체험
- 기념품: 부나하벤 전용 잔, 미니어처 세트, 원목 박스 한정판
- 이동 팁: Port Askaig에서 자동차로 약 25분 소요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실제 해풍을 맞으며 위스키를 테이스팅하는 순간입니다. 말 그대로 ‘바다와 함께 마신다’는 표현이 실감나는 경험이죠.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위스키의 탄생지와 정체성을 몸소 느끼게 해주는 시간입니다.
소리 없는 울림, 부나하벤의 아름다운 반란
부나하벤은 아일라라는 거친 바다의 섬에서 나온 위스키이지만, 누구보다 부드럽고 우아합니다. 피트향이 없어도 위스키가 깊고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조용한 반란을 일으킨 셈이죠.
이 위스키는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긴 시간 천천히 익혀낸 풍미로 당신에게 속삭입니다. 피트의 거친 매력을 잠시 내려놓고 싶은 날, 부나하벤의 한 잔은 바다보다 더 깊은 위로가 되어줄 것입니다.
“강한 것이 늘 위대한 것은 아니다. 때론 고요함이,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 Bunnahabh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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